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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삶의 기억] (4) 87세 안병숙 씨: “시어머니에 대한 한과 미움 풀어야 눈 편히 감을 것”

2019-05-14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모여 커다란 역사를 이룹니다. 조선비즈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기억을 기록으로 남기려고 ‘내삶의 기억'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모든 삶은 기록할 가치가 있다’라는 기치아래 우리 부모님, 이웃 사람들의 삶을 기록할 것입니다. 또 특정 사건이나 특정 장소에 대한 여러 사람의 기억도 모아 역사로 남기려고 합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 바랍니다. [편집자]

"시어머니의 온갖 구박과 저주… 죽어서도 시댁 선산에 묻히고 싶지 않아"
"나는 원하는 인생을 못 살았으나, 자식들은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 하며 살길"

"다 잊힐 줄 알았는데 나이가 드니 오히려 옛일이 새록새록 생각난다. 어린 시절에 있었던 일이며 결혼생활 등을 자꾸 떠올리게 된다. 즐거울 때도 있었고 슬플 때도 있었다. 뿌듯했던 일도, 억울한 일도 많았다. 누구나 자기 인생을 몇 편의 드라마요 몇 권의 책이라고 할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살아온 세월을 돌아보니 웬만한 드라마 못지않게 우여곡절도 많고 파란만장했다. 누구보다도 맵고 혹독한 시집살이를 했기에 한도 많다. 내게 악담을 퍼붓고 괴롭히던 시어머니와 내게 방패막이가 돼 주기는커녕 가정에는 무심했던 남편, 이들에 대한 한과 미움이 너무도 크다."

 

 

 

안병숙씨 막내 딸이 제안해 출간한 어머니 자서전 ‘풀 것은 다 풀고 가리라' 기억의책 표지사진. /사진=꿈틀제공

안병숙(여?87) 씨는 자신의 한 맺힌 삶을 돌아보며 "사는 동안 이것을 다 풀고 가지 않으면 편히 눈 감을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 같은 마음을 헤아린 막내 딸 윤한옥씨의 권유로 2018년 ‘풀 것은 다 풀고 가리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출간했다. 책을 통해 그간의 설움을 조금이나마 풀었고, 그 오랜 미움도 이제는 풀어낼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안씨는 "아이들이 아니었다면 내가 그 모진 세월을 어떻게 견뎠을 지 상상이 안된다. 늘 내편이 돼 준 여섯 딸들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먼저 간 남편을 대신해 든든한 기둥이었던 두 아들도 참 고맙다"고 했다. 이렇듯 안씨에게는 자식이 전부였다. 안병숙씨와의 인터뷰와 기억의책을 토대로 안씨의 삶을 1인칭 시점으로 적어본다.

◆ 개화한 아버지, "좀 더 잘살기 위해 만주로"

나는 1933년 김해 대저면 울남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성함은 안계수, 광주 안씨다. 어머니는 이원순, 광주 이씨다.

아버지 고향은 밀양인데 총각 때 돈을 벌러 김해에 내려오셨다 한다. 이곳에서 어머니를 만나서 결혼하셨다고 했다. 두 분은 육남매를 두셨다. 첫째는 아들(오빠), 둘째가 나, 셋째와 넷째가 아들, 다섯째는 딸, 막내가 아들이다. 원래 우리 형제는 열한 명이었는데, 다섯을 일찍이 잃었다.

내가 첫 돌을 맞기 전 아버지는 할아버지께 만주에 가겠다고 했다 한다. 농사도 짓기 싫고, 장이 안 좋아서 더 이상 보리는 못 먹겠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아버지는 그 당시 만주를 희망과 기회의 땅으로 여기셨다.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일제에 빼앗기고 얼마 남지 않는 이곳과는 달리, 만주에서는 좀 더 잘살 수 있으리라 기대하셨다.

만주에 대한 기대감도 크셨지만 아버지는 새로운 일에 도전하기를 좋아했다. 젊은 시절부터 아버지는 신학문 등 새로운 문물을 적극적으로 배우고 받아들였다. 사업에 대한 욕심도 많았다. 돈이 모인다는 곳이면 주저하지 않고 가셨다. 우리나라 방방곡곡은 물론이고 일본에 건너가시기도 했다.

이런 아버지와 달리 할아버지는 전통과 뿌리를 중시하는 분이셨다. 할아버지는 마을에서 참봉(조선시대 최말단직 종구품 벼슬)으로 불리셨는데 한학에 밝으셔서 마을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치셨다. 

우리 오빠도 어릴 때 할아버지께 천자문 등을 배웠다고 했다. 할아버지로 인해 마을에서도 양반 집안으로 유명했고, 집안에서도 가풍이 엄격했다.

할아버지는 아버지의 만주행을 마냥 반기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더군다나 아들이 간다는 곳은 풀 한 포기 나지 않는다는 머나먼 이국땅이었다. 이제 결혼도 했으니 자손을 이어가며 정착하기를 원하셨다.

 

 

 

안병숙씨가 스무살 무렵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 뒷줄 가운데가 안씨.


◆ 고향과도 같았던 만주 벌판

나는 돌이 되던 해 만주로 갔다. 유년 시절과 10대의 절반을 이곳에서 지냈으니 내겐 태어난 곳인 김해 대저보다 만주가 더 고향 같다. 아버지는 큰 포부를 안고 만주로 갔지만, 드넓은 만주 벌판에서는 할 일은 뻔했다. 

만주에 와서도 아버지는 농사를 피할 수는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직접 땀 흘려 일하지 않고 중국인들을 부렸다는 것이다. 논이나 밭을 갈 때도 중국인들이 말을 가지고 와서 했다.

만주는 추운 곳이었다. 얼마나 추운지 겨울에는 땅 밑의 물까지 꽁꽁 얼어붙어서 물을 구할 수 없었다. 동네 남자 어른들이 샘이며 우물 밑에 있는 얼음덩어리를 도끼로 깼다. 그러면 여러 조각으로 나눠진 얼음덩어리를 몇 집이 나눠 가졌다. 어릴 때는 세상 어디든 겨울에는 만주만큼 추울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추운데도 사람들은 주로 나막신을 신고 다녔다. 아마 일제시대여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이를 신었다. 

아버지는 첫딸이라서 그런지 나를 많이 아끼고 예뻐하셨다. 내가 행여나 감기라도 걸릴까 봐 걱정됐는지 어느 날 시장에서 장갑과 벳신(현재의 운동화)을 사오셨다. 동네 아이들은 한겨울에도 앞코며 발등이 드러난 나막신을 신었지만, 난 따뜻한 신발에 발을 감쌀 수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혹독한 만주의 추위 속에서 딸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하셨나 보다. 어느 겨울, 아버지는 학교까지 오가는 길이 춥다며 학교를 그만두게 하셨다. 학교에 가려면 십 리 가까이 걸어야 했으니, 오가는데 이십 리 거리는 춥지 않아도 어린아이가 다니기 먼 길이었다. 

그래서 같은 마을에 사는 학교 고학생이 학교 갈 때면 깃발을 들고 동네 아이들을 모아서 함께 갔다. 먼 길이니 어린 아이들끼리 보내면 길을 헤매거나 아이를 잃어버리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오빠는 그 동네에서 유일하게 사범학교를 다녔으니 아버지의 교육열은 높은 편이었다. 그러니 내가 더 우겼으면 보내주셨을텐데 그때는 나도 철이 덜 나 공부에 때가 있다는 것을 몰랐다. 만주의 추위도 나를 편안한 집에 머물고 싶게 했다. 

그러나 때를 놓친 공부를 나중에 따라 잡으려 하니 결코 쉽지 않았다. 까막눈이라도 면하고 싶어 막냇동생의 국어교과서를 가지고 꾸준히 공부했다. 그 결과 한글을 깨우칠 수 있었다.

◆ 해방 후 만주를 떠나다…"팔로군이 좋나, 유엔군이 좋나"

나는 열다섯 살에 만주를 떠났다. 일제에서 해방되고 1년이 지났을 무렵이다. 그곳에서 함께 지내던 많은 이웃은 해방 직후에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우리 집은 그러지 못했다. 우리 가족은 오빠네 세 식구까지 합하면 11명이나 됐다. 

오빠는 그 무렵 막 결혼을 해 돌도 안 지난 아기가 있었고, 엄마도 아이를 낳은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젖도 못 뗀 갓난쟁이들까지 데리고 먼 길을 나섰다가는 다 죽인다고 아버지가 돌아갈 날을 하루하루 미뤘다.

아버지는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자 고향에 돌아갈 결심을 했다. 해방 후 일본인들이 전기를 끊어놓고 나가서 기계를 돌려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그동안은 그럭저럭 버텼지만 도저히 더는 안되겠다 싶으셨나 보다. 

해방 직후에 많은 사람이 귀국할 때 함께 나왔으면 덜 힘들었을 텐데, 1년이 지나고 나오려니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길도 몰랐고, 교통편도 막막했다.

우리 가족은 같은 마을에 남아있던 네 식구와 함께 걸어서 나왔다. 우리가 살던 남만주 영구에서 출발해 하루 50~60리 길을 걸어갔다. 어른들은 어린아이들을 업거나 짐 위에 올리고 갔다. 나는 짐을 들기도 했고, 어린 동생들을 업어주기도 했다. 여름이라 한낮 더위만 아니면 날씨는 그런대로 견딜 만 했다.

우리는 부지런히 걸어 압록강 하류 지역인 중국 단둥에 도착했다. 거기서 다리를 건너야 했는데 다리가 끊어져 있어서 배를 타고 나왔다. 건너니 바로 신의주였다. 신의주에 도착하니 한 명씩 붙들고 질병검사를 해줬다. 

우리나라 사람 외에도 중국인과 서양인이 있었는데 그들은 우리에게 "팔로군이 좋나? 유엔군이 좋나?"라고 물었다. 팔로군은 1937~1945년에 일본군과 싸운 중국공산당의 주력 부대 중 하나다. 

어른들이 우리에게 미리 귀뜸으로 답을 알려줬기 때문에 그곳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다소 긴장감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는데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국경 하나 넘어왔을 뿐인데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며 살갗에 닿는 공기가 달랐다. 내 고국이라 그런지 모든 것이 좋고 아름답게만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날 놀라게 한 것은 진한 초록빛의 나무였다. 만주에서는 푸른 빛을 띠는 것이라고는 논과 밭, 그리고 바닷물 정도였다.

평양을 거쳐 서울에 오니 크게 지어놓은 피난민 수용소가 있었다. 매일같이 숙박비를 지불할 수도 없던 터라 우리 식구는 이곳에 머물기로 했다. 그곳은 2층으로 돼 있었는데 가운데 통로가 있고 양쪽에 다락이 있는 형태였다. 

우리가 갔을 때는 아래층이 다 차서 2층에 있어야 했는데 막내가 떨어져서 머리를 다쳤다. 그때 다친 흉터가 지금도 남아있다.

임시거처로 삼긴 했지만, 여러 사람들로 북새통인 그곳이 살기 편했겠는가. 더구나 난 열여섯 여자애였고 한창 예민할 나이였다. 나의 그런 고충을 아셨는지 어느 날 아버지가 나하고 내 바로 밑 동생에게 아버지 따라 큰집에 가서 지내자고 하셨다. 

큰집에 가면 큰어머니 살림이며 집안일, 농사일을 열심히 도와야 한다고 하셨다. 우리는 부산에 있는 큰어머니댁에 갔다. 큰아버지는 돌아가시고, 큰어머니가 할아버지를 모시고 계셨다.

아버지는 큰집에 가면 우리 논을 돌려받아서 농사를 지을 생각이셨다. 하지만 그 논은 이미 남에게 넘어가고 없었다. 큰어머니가 혼자 농사를 지을 수 없어 남에게 넘긴 것이다. 큰어머니는 남에게 주면서 아들(사촌오빠)이 크면 돌려달라고 했다. 

하지만 농사짓는 사람이 곧 땅 임자가 되는 세상이어서 논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래도 한 마지기 정도는 남아 있었는데, 사촌오빠가 끝까지 우리에게 돌려줄 생각을 안했다. 

◆ 정부가 나눠준 열 마지기 땅에서 새 출발

큰집에서 지내던 아버지와 오빠는 몇 달 후 방을 얻어서 나갔다. 나는 사촌오빠가 결혼할 무렵 나왔다. 1년이 조금 지나자 어머니도 동생들을 데리고 김해로 내려오셔서 큰오빠만 빼고 우리 가족이 다 모이게 됐다. 

그때 큰오빠는 서울에서 경찰로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남북 사이가 좋지 않았다. 육촌 오빠들이 오빠한테 경찰이어서 더 위험하니 빨리 내려오라고 했다. 

6.25 전쟁이 터졌다. 내 나이 열여덟이었다. 전쟁이 나자 내가 살던 부산을 각지에서 봇짐을 들고 온 피난민들로 북적였다. 다행히 우리 집안에는 큰 변고는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나라가 조금씩 안정이 되자, 정부에서는 만주에서 돌아온 사람들에게 땅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우리는 식구가 많아서 열 마지기 정도 받았다. 

땅 한쪽에는 농사를 짓고, 한쪽에는 집을 새로 지었다. 집 지을 돈은 고향에 돌아와 다시 교편을 잡은 큰오빠가 마련했다. 그즈음 큰오빠는 같이 선생님으로 일하는 여자를 만나 새 장가를 들었다. 올케언니는 좋은 사람이었고, 아이들에게 친엄마 못지않게 잘해줬다.

아버지가 농사를 짓고, 선생님으로 일하는 오빠 부부에게서도 매달 수입이 들어왔다. 우리 식구는 만주에서 돌아온 지 몇 해 지나지 않았는데도 친척들보다 부유해졌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우리 땅이 비행장 부지로 편입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다시 농토와 집을 잃게 됐다.

오빠는 한동안 우리 가족과 함께 살다가 우리 형제가 하나둘 결혼할 무렵 분가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고향 김해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고, 오빠네 식구는 학교 근처에 집터를 물색해 기와집을 새로 지었다.

 

 

 

안병숙씨의 젊은 시절 남편 윤갑철씨의 모습. 경찰이었던 남편은 결혼하며 선생님으로 직업을 바꿨다.


◆ 친정어머니가 밀어붙인 결혼…"마음에 들지 않아"

스무 살이 되자 결혼 얘기가 나왔다. 어머니는 나이가 찬 딸이 혼기를 놓칠세라 좋은 혼처를 수소문했다. 얼마 안 돼 어머니 이종사촌 조카가 자기 매형이 있으니 한번 보라고 했다. 어머니는 예비 신랑을 보고는 흠뻑 반해 버렸다. 경찰이라는 확실한 신분도 마음에 들어 했다.

오빠는 어머니가 예비 신랑을 보러 가기 전 신신당부했다. 자기 눈으로 직접 보기 전에는 나를 절대 결혼 못 시킨다고 했다. 그날 오빠는 예비 신랑을 보러 대저면에서 장유면까지 자전거를 타고 갔다. 

꽤 먼 거리라 페달을 연신 힘차게 밟아가며 비 오듯 땀을 흘리며 왔는데 예비 신랑은 먼저 가고 없었다. 자기 아버지 제사를 모셔야 한다면서 갔다는 것이다.

큰오빠는 관상학을 공부해서 관상을 좀 볼 줄 알았다. 신랑감을 직접 보겠다고 한 이유도 관상을 보고 성품을 가늠해 보려던 것이었다. 그런데 손위처남이 될 사람을 그렇게 대했으니 신랑은 그날 이후 오빠에게 경우 없고 몰지각한 사람으로 찍혔다.

그런데 그날 시어머니가 그 자리에 있었던 모양이다. 오빠는 시어머니를 보자마자 이 결혼은 말려야겠다 싶더란다. 관상을 보니 속이 좁고, 질투심이 많으며 성격도 보통 고약하지 않다는 것이 오빠의 의견이었다. 

오빠가 친정어머니한테 그렇게 얘기하며 결혼을 말렸더니 어머니가 문을 쾅 닫고 나가셨다. 친정어머니는 예비 사위가 너무도 마음에 들었다.

아버지는 오빠와는 좀 다른 이유로 결혼을 반대하셨다. 너무 없는 상태에서 나를 시집보내는 것이 마음에 걸리셨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친정어머니가 좋은 혼처 놓친다고 애태우는 것도 보기 힘드셨던지 결국 시집을 보내기로 하셨다.

1952년 3월 스무 살에 결혼했다. 신랑 이름은 윤갑철, 세 살 차이였다. 친정어머니의 은근한 압박에 못 이겨 결혼했지만, 신랑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큰오빠에게 무례한 행동을 했고, 경찰이라는 직업도 싫었다. 

경찰은 늘 돌아다녀야 하니 집에 잘 있지 않을 것 같았고, 위험한 일을 하니까 걱정이 끊이지 않겠다 싶어서였다. 다행히 남편은 결혼할 무렵에는 선생님으로 직종을 바꿨다. 

난 신랑에게 도무지 정이 들지 않았다. 신혼 때야 서로 어색해서 그렇다 해도, 다들 아이 낳고 살다보면 정도 들고 부부 사이가 무던해진다고 하던데 난 아니었다. 시집살이가 독해질수록 남편이 더 싫어졌다.

 

 

 

시어머니와 어릴 적 손아래 시누이, 남편의 어릴 적 모습.


◆ 욕 퍼붓던 시어머니…"머슴처럼 살던 나를 이웃들이 불쌍히 여겨"

시어머니는 나를 며느리로 들인 이래 장유면에서 유명인사가 됐다. 하루가 멀다고 며느리를 들볶아 대니 금세 이웃에 독한 시어머니로 소문이 난 것이다. 

이웃 아주머니들은 날 불쌍하게 여겼다. 내가 너무 순해서 시어머니가 더 깔보고 구박하니 너무 착하게 굴지 말고 악다구니도 좀 쓰라고 했다. 그러나 난 우악스러운 시어머니를 상대할 엄두가 안 났다.

시집온 지 두 달이 조금 지났을 때, 시어머니는 변소에 있는 똥을 퍼다가 거름을 만들어 밭에 뿌리는 일을 시켰다. 이제 갓 시집온 내게 그런 일을 꼭 시켰어야 했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 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초가지붕도 엮어야 했고, 흙담도 쌓기 위해 일일이 짚과 흙을 섞어서 덮었다. 시집와 처음 가을걷이를 할 때는 일꾼이 다 못 나른다며 나한테 쌀가마니를 나르라고 했다. 이쯤 되니 내가 시집을 온 것이 아니라 머슴 살러 온 것 같았다.

시어머니가 날 일꾼처럼 부린 이유는 지독한 인색함 때문이었다. 시집온 첫 겨울 나는 시어머니와 시집 안 간 시누이랑 한방에서 자야 했다. 땔감을 아낀다고 시어머니는 신랑을 다른 집 가서 자게 하고, 남은 식구들은 한방에서 함께 자게 했다. 시어머니는 자기 것은 귀하게 아끼고 남에게 베풀 줄 몰랐다. 남에 대한 배려나 이해심도 부족했다.

내가 뭘 해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어떤 경우에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내게 욕을 퍼붓기도 했다. 시어머니가 욕을 할 때면 머리에 천둥이 치는 것 같았고 가슴이 쿵닥쿵닥거렸다. 

그런 심한 욕은 생전 처음 듣는 것이어서 더 두려움이 컸다. 몸을 웅크리고 귀를 꼭 틀어막고 있었다. 나중에는 피하는 것이 상책이란 생각에 밭에 나가 살았다. 날이 밝으면 호미를 들고 나가서 해가 지면 돌아왔다.

시어머니가 내게는 심술을 부렸지만 자기 아들과 딸은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 모른다. 그래서 받은 차별도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스물셋에 결혼한 손아래 시누이가 아기를 낳고 친정에 왔을 때다. 이 즈음 시누이는 젖이 헐어서 아기에게 젖을 무리지 못하고 밥물을 대신 먹였다. 그런데 이때 시어머니는 사카린 대신 설탕을 사다가 시누이에게 건넸다. 

먼저 첫아이를 낳은 내게는 사카린을 먹이라고 사다 줬었다. 이를 두고 친정오빠는 그게 얼마나 안 좋은 것인데 윤서방이 말리지 않았다며 혀를 끌끌 차기도 했다.

아무리 이해해 보려고 해도 시어머니의 심보를 생각하면 고약하게 느껴진다. 아마도 첫아이가 딸이어서 그런가 싶다. 첫 손주인데도 시어머니는 딸을 낳았다고 침통해 했다. 

아이를 낳고 기진맥진해 누워있는 내게 누구 하나 미역국조차 끓여주지 않았다. 어머니의 눈치를 보느라 그랬는지 모르지만, 남편도 반기지 않았다. 마치 초상이라도 난 집 같았다.

◆ 시댁에서 몰래 도망칠 기회만 노려

시어머니는 매우 의심이 많고 인색했다. 안방 문에 달린 조그마한 창문으로 내가 무엇을 하는지 쌀이나 곡식을 함부로 쓰는지 늘 감시했다. 새는 물건이 없는지 집 안 장독에 담긴 쌀이나 곡식을 매일 점검했다. 아들 샘도 대단했다. 신혼 방을 엿보기도 했으니, 지금 생각해도 정말 섬뜩하다. 

시어머니는 날이 갈수록 구박과 잔소리가 심해졌다. 어느 날 나는 더 이상은 이렇게 못 살겠다 싶었다. 그래서 친정에 갔다가 셋째를 놓고 왔다. 셋째를 친정에 미리 맡겨 두고 집에서 혼자 슬쩍 빠져나올 생각이었다. 

셋째는 아직 어려서 내가 돌봐야 했다. 다른 아이들한테는 미안했지만, 나중에 나머지 애들도 데리고 올 방법이 생기리라 싶었다.

몰래 빠져나갈 기회만 엿보고 있는데 교직에 있던 남편이 방학을 맞았다. 남편이 낮에 나가지도 않고 집에만 있으니 나올 수가 없었는데, 다섯 살짜리 둘째가 갑자기 아팠다. 온몸에 열이 펄펄 끓었고, 그럴 때마다 경련을 일으키며 방에서 이리저리 굴렀다. 

시내 병원에 데리고 가니 뇌염에 걸렸다고 했다. 다 내 탓 같았다. 엄마가 없어질 것을 어떻게 알고는 자기도 좀 봐달라고 병에 걸린 건 아닌가 싶었다. 둘째를 입원시키고 밤낮으로 돌봤다.

며칠 후 둘째가 입원한 병원에 시어머니가 왔다. 시어머니는 거기서도 악다구니를 썼다. 셋째를 친정에 데려다 놓은 것을 가지고 내가 아이를 죽이려고 친정에 보냈다고 욕을 퍼붓고 울고불고 했다. 무슨 일로 그러는가 싶어 간호사를 비롯해 다른 환자 가족들, 병원 사람들이 다 시어머니를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그때 친정아버지도 와 계셨는데 그걸 보고는 아무 말 없이 돌아가셨다. 내가 매운 시집살이를 한다는 것을 친정오빠한테 들어 아셨을 테지만, 직접 그 광경을 보고는 마음이 어떠셨을까. 아이들 결혼시키고 나서야 그날 아버지 가슴이 얼마나 아팠을지 그 심정이 헤아려졌다. 

우여곡절 끝에 셋째는 다시 집으로 데려다 놓았다. 친정오빠는 그렇게 힘들게 살 바엔 이혼하는 편이 낫다며 몇 번이나 이혼시키려 했다. 하지만 친정부모님은 가타부타 별 말씀이 없으셨다. 시어머니한테 불편한 내색 한 번 비치지 않으셨다.

 

 

 

안병숙씨가 어린 큰아들, 작은 아들과 함께 찍은 사진. 여섯 딸에 이어 아들을 낳고 나서야 시어머니로부터 처음 미역국을 얻어 먹을 수 있었다.


◆ 내 인생의 상처, 넷째

세월이 많이 지났지만 나는 지금도 시어머니 생각하면 마음이 불편하다. 시어머니는 집에 무슨 작은 나쁜 일이라도 생기면 내 탓을 했다. 나 때문에 나쁜 일이 생겼다고 구박했다. 

시누이가 젊은 나이에 아이 셋을 남기고 암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도 내 탓을 했다. 나에게 "시누이가 죽으니 좋지"라며 나에게 악담을 퍼부었다.

시집살이 내내 시달리고 구박받고 때로 맞기도 하며 징글징글하게 힘들었지만 내게 정말로 큰 상처가 된 것은 따로 있다. 

시어머니 잔소리는 눈뜨자 마자 시작해 잠자리에 들어야 끝났다. 나는 그 소리가 듣기 싫어 밭일을 나가 점심도 먹지 않고 일했다. 그 때 넷째 아이가 뱃속에 있었다. 나도 영양실조가 걸렸는지 아이를 낳기 전에 걸음이 안걸릴 정도였다.

아이가 영양이 부족했는지 한 달 먼저 나오려고 했다. 시어머니는 큰 시누이 집에 가서 낳으라고 하는 것이었다. 돼지가 곧 새끼를 낳으려고 하는데, 애 때문에 돼지새끼가 죽을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면서 "아이가 죽으면 돼지 새끼가 잘된다고 하더라"라는 말로 저주도 퍼붓는 것이었다. 넷째는 영양이 부족하고 아홉달 만에 나와서 그런지 사람의 모습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병원에서는 영양부족으로 미숙아로 태어났다고 했다.

넷째는 젖도 제대로 빨지 못했지만 그래도 조금씩 성장했다. 그러나 정상이 아니었다. 아이는 걸음걸이도 제대로 걷지 못했다. 넷째가 그리 된것은 내죄도 크다. 하지만 시어머니가 그렇게 괴롭히지만 않았으면 넷째가 그리 되었을까.

난 남들에게 자식이 5녀2남이라고 말한다. 넷째는 빼고 말하는 것이다. 넷째는 내 인생의 큰 상처다. 아직도 병원에 있다. 큰 며느리가 기저귀를 사다주고 돌본다. 나는 그 애가 죽기 전에는 눈을 못 감을 것이다. 나는 그 일이 있고 나서 시집에 오만 정이 다 떨어졌다.

◆ "아들 낳고서야 가슴 좀 펴고 살아"

내가 딸만 여섯을 낳자 종중에서도 말이 나왔다. 새 며느리를 들여서라도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시어머니와 남편의 아들 타령이 더 심해졌다. 나라고 아들을 바라지 않았겠는가. 

이번에는 아들이겠지 하고 낳으면 또 딸이었다. 그렇게 딸만 여섯을 낳으니 이제는 겁이 났다. 여기저기 알아보니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했다. 절에 가면 불전(佛錢)도 드려야 하는데 당장 돈을 구할 데가 없었다. 그래서 집에 있는 쌀 두 되를 가져가곤 했다.

부처님만 의지하자니 불안해서 무당집을 찾아갔다. 무당에게 아들 낳는 부적이나 방법을 물으니 지앙(아이의 점지와 해산을 맡은 신령을 일컫는 제왕의 사투리)이 잘못됐다며, 딸 지앙과 아들 지앙을 바꿔야 한다고 했다. 산신령한테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시어머니한테 말씀드렸더니 돈이 든다고 반대했다. 그러다가 남편도 하자고 하니 그제야 허락하셨다. 

그러나 말뿐이었다. 제사 준비를 위해 묵을 쑤려고 집에 있는 메밀을 씻고 있는데, 시어머니는 종자로 쓸 건데 쓸데없는 데 낭비한다고 욕을 했다. "그러면 손자 볼 생각 마이소. 내가 아니면 메밀 심을 사람도 키울 사람도 없으니 그건 알아서 하이소. 나는 못 심으니까. 어머니가 심어서 손자 보듯 자손 대대로 메밀이나 키우고 사소"라며 퍼부었다. 속이 후련했다. 결국 이웃집에서 메밀 한 되를 빌려 메밀묵을 쒔다.

무당말대로 지앙을 바꿔서인지 아니면 부처님께서 굽어살펴 주셔서인지 또는 아들이 태어날 차례여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 다음에는 아들을 두 명이나 낳았다. 하지만 아들을 낳았다고 하루아침에 세상이 바뀌지는 않았다. 

시어머니도 여전했고, 남편도 태도가 조금 부드러워졌을 뿐 특별히 잘해주지는 않았다. 그래도 아들이라고 생전 처음 시어머니한테 미역국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비록 고기 한 점 안 들었지만 감격스러웠다. 더 이상 아들 못 낳은 죄인은 아니었다.

 

 

 

집 마당에서 남편과 찍은 사진.


◆ 중풍 시어머니 3년 병수발

시어머니는 79세로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전 3년 동안 중풍으로 고생하셨다. 말도 못하고 몸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가끔 체머리(머리가 저절로 흔들리는 병적인 현상)가 있을 뿐, 줄곧 누워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내게 온갖 욕을 다 퍼붓고 몹시도 괴롭히던 존재가 이제는 죽음을 기다리며 얌전히 누워있는 것이다.

어느 날 남편이 술에 취해 와서는 내 손을 꼭 잡았다. 눈물을 흘리면서 어머니를 잘 돌봐줘서 고맙다고, 힘들겠지만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 했다. 남편 딴에는 염치가 없었을 것이다. 

기력 있을 때는 어지간히 나를 들볶아대더니 이제는 병치레로 고생시키니 말이다. 난 남편한테 내 양심껏 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날 생전 처음으로 남편에게 고맙다는 말을 듣고는 남편에 대한 미움과 원망이 조금 풀렸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선산에 모셨다. 남편이 장유면에서 면장을 해 문상객이 많았다. 장지에 모실 때는 멀리서 보면 선산이 하얗게 보였다.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기 때문이다. 

5일장을 지내며 돼지를 세 마리 잡았다. 장례가 끝나고도 집에다 빈소를 차려놓고 1년 상을 치렀다. 내가 자처했다. 매일같이 제상을 차리는 번거로움은 있었지만, 그렇게 하고 나니 정말 시어머니한테 내 할 도리는 다한 듯해 마음은 편했다.

그 후 시어머니를 꿈에서 한 번 뵀다. 휴일 낮잠에서 꿈속의 시어머니는 늘 그랬던 것처럼 내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난 그 손을 놓으려 애쓰며 비명을 질렀다. 그러다가 꿈에서 깼다. 내가 놀라며 깨자 옆에 있던 남편이 무슨 꿈을 꿨냐고 물었다. 차마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1991년 미국 하와이 여행에서 촬영한 안씨 부부 모습.


◆ 여행 중 세상을 떠난 남편…"남편에 대한 원망 제대로 못 풀어"

시어머니가 살아계실 때는 가족끼리 어딜 가 본 적이 없었다. 요즘처럼 해외여행을 가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여름 무더위를 피해 해수욕장은 가던 시절이었다. 방학 때 딸아이가 우리는 왜 다른 가족들처럼 해수욕장 한번 안가냐고 원망한 적이 있다. 

큰딸이 첫째 남동생이 태어나고 여름이 오자, "엄마, 우리도 아들 낳았으니까 아버지한테 해수욕장 한번 가자고 해요"라고 했다.

하지만 시어머니 때문에 못 갔다. 시어머니는 어딜 다니기 싫어하시기도 했지만, 어디 다니며 돈을 쓰는 것을 낭비라고 했다. 시어머니께서도 마음의 여유가 있으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더 넓은 세상을 구경했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특히 남편과는 미국, 중국, 싱가포르, 태국 등 많은 곳을 여행했다. 유럽도 함께 가기로 했지만 그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새집을 지은 후 남편 건강이 악화된 것이다. 

지금 사는 집인데 IMF 외환위기 때 자재가 대부분 외국산이어서 몇 배의 값을 치른 후 간신히 지었다. 집 짓는 동안 밤낮으로 현장을 지켜본 남편은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들었을 것이다.

집을 다 짓고 얼마 후 남편은 뇌경색으로 쓰러졌고, 같이 병원에 다니며 치료를 받았다. 좀 괜찮아진 것 같아서 둘째 딸과 셋이서 금강산도 다녀왔다. 이제는 다 나았겠지 싶어서 남편 친구들과 일본 여행을 갔는데 그곳에서 남편 건강이 갑자기 안 좋아졌다. 

다행히 남편 친구 중 한 명이 일본어를 잘해 현지 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았다. 며칠 후 일본으로 건너 온 아들과 사위를 보니 마음이 놓였다.

한국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비행기에는 의료 장비 등을 실을 수 없어서 배를 타고 나왔다. 수간호사 한 명, 의사 세 명이 동행했고 산소 호흡기도 두 통이나 챙겼다. 하필이면 태풍이 올 때라서 풍랑이 심해 어려움이 많았다. 한국으로 가는 중에 남편은 조용히 눈을 감고 나와 작별했다.

남편이 갑자기 곁을 떠나자, 마음이 허전했다. 고된 시집살이를 하면서 쌓인 남편에 대한 원망도 컸건만 제대로 풀지 못한 것 같았다. 남편이 살아있을 때는 무엇 하나 속 시원히 말해본 적이 없었다. 섭섭했던 일, 분한 일 등 따질 일이 얼마나 많은데 남편한테 사과 한 마디, 해명 한 마디 듣지 못한 것이 못내 안타깝다. 

 

 

 

안병숙씨의 85번째 생일을 맞아 촬영한 가족사진.


◆ 70대에 비로소 내 뜻대로 살아…"내 삶의 방식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아이들도 다 결혼을 해서 내가 돌보거나 신경 쓸 일도 별로 없었다. 남편 못지않게 나 역시 가만히 있는 것은 못 견딘다. 집에 있으면 바느질이라도 해야 했다. 

옷을 만들거나 화단을 가꾸기라도 해야 제대로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았다. TV를 보며 보내는 시간은 아까웠다. 그래서 절에도 전보다 더 열심히 다녔다. 불교대학에서 회장을 했고, 전국 명승지에 있는 사찰을 안 가 본 곳이 없다.

공부도 하고 싶어서 농협에서 운영하는 주부대학에 다녔다. 늦게나마 학창시절이란 것을 경험해 보니 좋았다.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하나하나 깨우치고 배우는 즐거움이 컸다. 

주부대학을 졸업하고는 노인대학도 다녔다. 장유면에서 가장 큰 경로당에서 5년간 회장을 맡기도 했다. 노인들은 내 임기가 끝나자 내가 회장을 계속하면 안 되냐며 아쉬워했다.

 

 

 

1993년 농협 주부대학 수료식 모습. 안병숙씨는 70대에 들어서며 비로소 원하는 공부를 시작했다.


사람은 각자 맞는 장소가 있는데 내겐 절인 것 같다. 아들 낳으려고 다니기 시작했는데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절에 다닌다. 이따금 불경을 베껴 쓰며 부처님 말씀을 되새기노라면 깨닫는 바가 많다.

난 내 인생을 잘 살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아이들한테도 내 삶의 방식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 나는 종종 아이들에게 "나는 원하는 인생을 못 살았으니, 너희들은 마음 가는 대로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라"고 말한다. 앞으로도 각자 스타일대로 잘 살라고 응원해 주고 싶다.

< 안병숙씨의 연표 >
1930년 김해 대저면 울남리 출생
1934년 만주로 이주
1947년 해방 후 귀국
1952년 결혼
1953년 첫째 딸 출생
1971년 첫째 아들 출생
2002년 남편 작고
현재까지 노인대학 수료, 경로당 회장 등 다양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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