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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삶의 기억] (3) 81세 안준남씨: “모진 시댁살이에도 자식들 교육에는 타협 안해

2019-05-10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모여 커다란 역사를 이룹니다. 조선비즈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기억을 기록으로 남기려고 ‘내삶의 기억'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모든 삶은 기록할 가치가 있다’라는 기치아래 우리 부모님, 이웃 사람들의 삶을 기록할 것입니다. ‘내삶의 기억은’ 평범하지만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들의 삶에 대한 존경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 바랍니다. [편집자]

"공부 잘하고 말썽없이 잘 커준 세 아들이 자랑스러워"
"오빠들은 항상 내 버팀목… ‘인생 정상’ 올라보니 성취감도 있어" 

1970년 초 어느 날, 안준남(여?현재 81)씨는 전라북도 남원에서 서울행 비둘기호 밤기차에 몸을 실었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사는 친정 오빠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꼬박 8시간을 기차에서 보내고, 새벽 첫 시내버스를 타야했다. 

골목길을 오가는 사람조차 보이지 않는 이른 아침에 오빠 집에 도착했다. 너무 일찍 도착해 대문 앞 돌계단에 앉아 잠깐 잠이 들기도 했지만, 마당에서 인기척이 날 때까지 밖에서 기다렸다. 마치 그 때 막 도착한 것처럼 보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남들에게는 차마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시아재(남편의 형제를 일컫는 사투리)가 사업을 하다가 빚을 많이 졌고, 그 빚을 전부 고스란히 떠안으면서 생활고에 시달렸다. 몇 번을 망설이다 결국 오빠에게 돈을 빌리기 위해 밤기차를 탔던 것이다. 

오빠에게 조심스럽게 고민을 털어놨고, 오빠는 빚을 다 갚으라며 흔쾌히 큰돈을 내줬다. 논밭이라도 사서 잘 살라며 돈을 더 보태주기까지 했다. 남원으로 향하는 기찻길 내내 눈물이 흘렀다.

 

  

 

안준남씨의 팔순을 기념해 자녀들이 만들어 출간한 어머니 자서전 ‘나의 살아온 세월' 기억의책 표지사진. /사진=꿈틀제공

안준남씨의 장남 방만혁(53)씨는 지난날 어머니가 고생했던 얘기를 하며 연신 눈물을 글썽거렸다. 방씨는 어머니라는 단어만 나와도 두 눈이 붉어졌다. 가까스로 감정을 추스리며 "어머니는 어려운 형편에 고생을 많이 했지만, 저희 3형제에게 항상 원하는 것을 하라며 응원했다"고 말했다. 큰아들은 치과의사, 둘째는 신경내과 의사, 막내는 대기업에 다닌다.

방씨는 치과의사가 되고 나서 외삼촌 부부에게 무료로 임플란트 시술을 했다. 아들로서, 치과의사로서 가장 보람된 일 중 하나였다. 어머니로부터 외삼촌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얘기를 줄곧 들었기 때문이다. 큰아들로서 어머니를 위해 작은 숙제를 한 듯 했다. 방씨는 이에 그치지 않고 지난해 11월 어머니 팔순을 맞아 자서전을 생각했다. 동생들 모두 좋은 생각이라며 맞장구쳤다.

책 제목은 ‘나의 살아온 세월, 안준남 기억의 책’. 방씨는 "자서전이 나오자 어머니는 좋아하시다가도 쑥스러워하셨다. 그러면서도 아주 좋아하셨다"고 말했다. 손자손녀에게도 본보기가 됐다. 할머니의 자서전이 자연스럽게 가정교육의 교과서가 된 것이다. 

방씨의 대학생 딸은 "할머니는 어린 내게 수학 문제 푸는 법과 ‘할머니’라고만 부르던 할머니의 성함 석 자를 직접 적어 알려줬다"면서 "닮고 싶을 수 밖에 없는 멋진 할머니처럼 유능하고 착실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방씨의 고향은 남원시 주생면 지당리 소지마을이다. 방씨 집성촌으로 방탄소년단을 키워 낸 방시혁 빅히트 엔터테인먼트 대표와 방준혁 넷마블 이사회 의장의 고향이기도 하다. 어려서부터 한 집 건너 서로의 사정을 속속들이 아는 사이였다. 이곳에서 벌어진 세 아들의 어머니, 안준남씨의 이야기를 들여다봤다. 

다음은 기억의책 ‘나의 살아온 세월'을 요약한 것으로 안씨의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한다.

 

 

 

다섯 살 때 찍은 가족사진. 가운데 줄 왼쪽부터 아버지와 어머니, 앞 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안준남씨다.

 

 

◆ "막내는 이름이라도 남자로 살아야"…나이 비슷했던 조카들과 놀아

나(안준남)는 1939년 12월 9일 전북 순창군 동계면 이동리에서 태어났다. 아들 다섯에 딸 둘의 칠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부모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내가 태어날 당시 우리 집을 새로 지었는데 옛말에 새로 지은 집에서는 아이를 낳지 않아야 한다는 속설이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께서는 그런 속설에 휘둘리지 않고 그냥 집에서 낳으려고 마음먹고 계셨는데 우연히도 화장실에 갔다가 나를 낳으셨다. 등에 흙과 재를 묻힌 채로 나를 낳으신 어머니께서는 당신의 몸을 살필 여유도 없이 부랴부랴 나를 감싸 안고 방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요즘에는 상상도 하기 어렵지만 옛날에는 그런 일이 종종 있었다. 어머니 나이 마흔 두 살 때의 일이었다.

이름은 아버지께서 지어주셨다. 아버지는 옛날 분이라 남아선호사상이 있으셨다. 남의 집이라도 아들을 낳았다는 말을 들으면 잘됐다고 하시고, 남의 집 귀한 자식이라도 딸을 낳았다고 하면 안타까워하셨다. 

 

 

 

나는 물론이고 넷째 오빠도 태어나지 않을 때 찍은 가족 사진. 당시 오수국민학교에 재직하셨던 아버지는 수년에 한번씩 이렇게 가족사진을 찍어두었다. 왼쪽부터 아버지, 큰 오빠, 셋째 오빠, 어머니, 둘째 오빠, 외할머니, 언니.

그 때문에 내 위로 오빠가 다섯 명이나 있는데도 어머니께서 나를 낳으실 때 또 아들이었으면 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딸인 내가 태어나자 돌림자 준(準)에 사내 남(男)을 써서 이름을 지으셨다. 이름이라도 남자로 살게 하고 싶으신 것 같다. 나는 내 이름을 그렇게 지어주신 아버지가 가끔 야속하기도 했다.

큰 오빠와는 나이 차이가 많아 큰 조카가 나보다 한 살이 많았다. 둘째로 태어난 언니도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시집을 갔다. 넷째 오빠는 공부를 시작하면 옆에서 벼락이 쳐도 모를 정도로 집중했던 탓에 친절했던 다섯째 오빠와 종종 놀았다. 그러나 주로 나이가 비슷했던 조카들과 어울려 놀며 자랐다.

◆ 교사였던 ‘아버지’와 유복하게 자란 ‘어머니’

큰 집에서 양자로 오신 할아버지께서 낳은 자식 중에 대를 이을 사람은 우리 아버지뿐이라 일찍 장가를 보내셨다고 한다. 아버지께서는 열두 살 되던 해 정월달에 두 살 연상의 어머니와 결혼하셨다. 

아버지는 전주사범학교를 1회로 졸업하시고, 학교 선생님을 하시다가 내가 태어나기도 전인, 당신 나이 서른일곱에 학교를 그만두셨다. 일제강점기였던 당시 학교에서도 높은 자리는 전부 일본 사람들이 차지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말단에 머물며 핍박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순창군 동계면에 있는 친정아버지 공덕비 앞에서.

14년 동안 교사로 일하시면서 번 돈을 아껴 논 백여 마지기를 사서 농사를 지으며 살겠다는 생각이셨다. 그렇게 우리 집은 임실군 오수면에서 순창군 동계면으로 이사를 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직접 농사일은 하지 못하셨다. 대신 집에 있는 일꾼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그날 그날의 일을 알려주고 시키셨다.

어머니께서는 전남 곡성군 죽곡면 봉정리에서 만석꾼이라 불릴 만한 집안에서 무남독녀로 태어나 유복하게 자라셨다. 시골에서 우리 집은 꽤 괜찮게 살았는데도 어머니는 너무나도 절약하면서 사셨다. 

그 덕분에 시집을 오셔서 큰살림을 이뤄 부자 소리를 들었다. 동네 사람들과도 허물없이 잘 어울리며 차별을 두지 않으셨다. 식사 때가 되면 차려놓은 밥상을 일꾼들이 사랑채까지 들고 가서 먹어야 하는 수고로움을 생각하고 그냥 부엌방에서 당신과 함께 밥을 먹자고 말씀하곤 하셨다.

막내인 나를 시집보내 놓고 항상 걱정하셨던 어머니에게 나는 아픈 손가락이었다. 오빠들이 어머니에게 따로 돈 쓸 데가 없어도 주머니에 돈 넣은 재미라도 있으시라고 자주 용돈을 드렸다. 

한번 들어가면 나올 줄 몰랐던 어머니의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해진 돈이 나오는 때는 이미 시집간 내 손에 그 돈을 쥐어주실 때였다. 그렇게 받은 돈을 나는 한 푼도 허투루 쓸 수가 없었다. 

 

 

 

전주여자상업고등학교 재학 시절 내 모습.


◆ 마을에서 유일하게 학교다니는 여자 아이

아홉 살이 되자 동계국민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우리 마을에서 학교에 다니는 여자는 나 혼자뿐이었다. 학교는 집에서 6km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걸어가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본 적은 없지만 늑대가 살고 있다는 산길을 지나가야 하는 등하굣길이 무섭기도 했다.

비나 눈이라도 오는 날이면 땅이 질퍽질퍽해져 그렇지 않아도 힘든 등하굣길이 더욱 힘들었다. 아침에 비가 오면 아버지께서 당신이 직접 가르쳐줄 테니 학교에 가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어린 나도 그 비를 맞으며 질퍽이는 길을 걸어 학교 가기가 싫었던 터라 흔쾌히 아버지 말씀을 따랐다. 

그래서 1학년 때는 결석을 77일이나 하게 됐다. 그래도 2학년 때는 조금 컸다고 14일만 결석하고 학교에 열심히 다녔다. 공부도 제대로 하기 시작해서 우등상을 타기도 했던 게 바로 2학년 때였다. 

국민학교 4학년에 다니던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우리가 살던 동계라는 곳은 외진 곳이어서 낮에는 경찰들이 치안을 하고, 밤에는 빨치산이 내려오던 동네였다. 

불안한 상황에 도저히 여기서는 못살겠다고 생각해서 모든 식구들이 전주에 살고 있던 큰오빠 집으로 몇 달씩 피신을 가 있다가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당연히 학교도 제대로 다닐 수 없었다.

당시 셋째 오빠는 광주에서 의대에 다니느라 평소에는 집에 잘 오지 못했는데 그날은 무슨 일 때문인지 집에 왔다. 바로 그날 밤 빨치산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우리 집으로 왔고, 셋째 오빠를 데리고 가려고 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부모님은 데리고 가지 말라고 사정하고 또 사정했지만 빨치산들은 총칼로 위협하며 오빠를 그대로 데리고 가버렸다. 그것이 셋째 오빠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오빠가 스물세 살 때의 일이다. 

오빠는 결국 돌아오지 않았고, 어머니와 할머니의 울음소리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슬펐다. 그날은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도 가장 슬픈 날이다.

전쟁이 끝나고 열다섯 살이 돼서야 동계국민학교에서 5학년 2학기를 맞았다. 뒤늦게 다시 학교에 들어가게 된 것은 언니 덕분이었다. 

언니가 집에 와서 하는 말이, 지금은 여자들도 시집을 잘 가려면 졸업장이라는 ‘간판’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성적은 상관없이 일단 학교는 나와야 한다고 했다. 언니가 해준 말 덕분에 3학년 초까지 다니다 만 나는 다시 국민학교에 들어가 졸업까지 할 수 있었다.

전주여자중학교에 들어가기는 무척 어려웠다. 나는 성적이 부족해서 떨어졌고, 대신 중앙여자중학교에 입학했다. 전주에서 중학교에 다닐 때는 다섯째 오빠와 한 살 어린 조카, 두 살 어린 이질녀와 함께 자취했다.

고등학교는 사실 가지 않으려고 했다. 중학교만 졸업하면 집에 있다가 시집을 가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다섯째 오빠가 "넌 성적이 안되니 전주여상을 가라"고 권유했다. 

그러면서 일단 시험은 봐두라는 말도 덧붙였다. 합격하고 나서 등록금을 내야 하는데 부모님께 차마 말씀을 드릴 용기가 없었다. 그런데 오빠가 자신의 대학 등록금으로 받은 돈 일부를 떼서 등록금을 내줬다. 

전주여상을 다닐 때 어울렸던 단짝 친구들은 지금도 친하게 지낸다. 장순임, 김상옥, 은금자, 그리고 나는 키도 엊비슷했다. 매번 뜻이 맞았던 것은 아니지만 서로 뒤로 험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정했다. 일평생 함께 한 친구가 있으니 나의 삶은 성공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고등학교 졸업앨범에 넣으려고 담임선생님과 함께 전동성당을 찾아 찍은 사진. 왼쪽부터 허명자, 김인자, 문경자, 나, 한문자 그리고 정동주 선생님.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여자아이들이라 이름에 자(子)가 많이 들어가 있다.


6.25전쟁을 겪으면서 늦어진 진학 때문에 스물 두 살에야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됐다. 당시 대학교 진학은 생각해보지 못하고 결국 집으로 내려와 몸이 편찮으셨던 아버지를 수발하며 지냈다. 

◆ 군 복무 중인 키 큰 남자와 결혼

학교 다니며 놀러다니던 사람이 집에만 박혀 있으니 어느날 병이 났다. 어머니가 시집가기 전에 하고 싶은 것 있으면 말해보라고 하셨다. 나는 그길로 서울에 가서 노라노 양재학원에 3개월 속성과정을 등록했다. 

3개월 과정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재봉틀로 어머니 옷을 만들어 드리기도 했다. 나는 그 당시에 손재주가 있었다. 작은 아들의 큰 딸이 나를 닮아 손재주가 있는 듯 하여 기쁘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3년 후 중매를 통해 결혼하게 됐다. 육촌 언니가 방씨 집안으로 시집을 가서 사는데, 시댁 어른들이 언니를 좋게 보고는 친정에 시집보낼 만한 좋은 사람이 있느냐고 물어본 게 계기가 돼 남편을 만나게 된 것이다.

 

 

 

1963년 8월 20일 약혼식 때 사진.


전주에서 맞선을 봤는데 그때 남편을 처음 봤다. 내가 키가 작다보니 2세를 생각해서 남편될 사람은 키가 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내 눈 앞에 나타난 남자의 큰 키가 눈에 들어왔다. 

나보다 한 살이 많았던 그 남자는 자신을 방극신이라고 소개했다. 전북대를 졸업하고 지금은 아직 군 복무 중이라고 했다.

취직을 쉽게 하던 때라 제대하면 무슨 일이라도 하겠지 싶어 다른 것은 크게 생각하지 않고 이 남자와 결혼하기로 마음먹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시아버지께서는 아버지와 전주사범학교 동창이셨다. 인연은 인연인 듯 했다. 

1963년 8월 20일 전주 시내의 한 회관을 빌려 양가 식구들이 모여 약혼식을 올렸다. 그런데 결혼식이 채 한 달도 남지 않았을 때 그동안 많이 편찮으셨던 아버지께서 갑자기 돌아가셔서 슬픔 속에서 결혼을 준비했다. 

집에서 초상을 치렀기 때문에 집에서 전통혼례를 올릴 수 없었다. 결국 조그마한 예식장에서 군대에서 휴가 나온 남편과 1963년 12월 25일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 전날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


◆ 시누이 다섯 명의 시댁살이…"힘든 하루하루 아이들 덕에 참고 살아가"

결혼식을 올리고 남편을 따라 시댁으로 왔다. 남원시 주생면의 지금 살고 있는 바로 이 집이다. 허름했던 집이었는데 15년 전쯤에 말끔하게 다시 지었다. 시아버지께서는 정년까지 교직생활을 하셨다. 

시댁에 와 보니 넓은 논을 갖고 있던 우리 집과 달리 종답(종중이 관리하는 논) 열두 마지기와 국유지였던 하천부지에 농사를 짓고 있는 땅이 전부였다.

무엇보다 종답이 종중의 소유인지라 농사지은 것을 내놓으라고 하면 내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마음에 편치 않았다. 한편으로는 창피하기도 했다. 그 뒤로 돈이 생기는 대로 어떻게든 논을 조금씩 사 모으기 시작해서 지금은 이 근방에서 우리가 논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있다.

남편은 결혼한지 5~6개월쯤 지나서 전역했다. 전역한 남편은 처음에 농촌지도소에 들어가 일하다가 적성에 맞지 않았는지 교직으로 옮겨갔다. 처음에는 국민학교에서 근무하다가 나중에는 중학교에서 정년까지 교사생활을 했다.
시집온 이후로 아이들 공부 때문에 전주에 잠깐 나가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이 마을을 떠나 살았던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남편이 마을을 떠나고 싶지 않아 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부모님의 그늘을 벗어나고 싶지 않아서인 듯 했다. 

나중 일이지만 한번은 그런 남편이 답답해 보여서 "누구누구의 아들로 살지 말고 방극신으로 살아"라고 말한 적도 있다.

시집온 지 얼마 안됐을 때, 마을 입구에 있는 정미소 앞에서 90kg짜리 쌀 한 가마니를 동네 아저씨와 함께 높은 턱을 넘어서 정미소 안으로 옮긴 일이 있었다. 그때 아저씨가 내게 ‘녹두장군’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체격은 작아도 당찼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다른 동네 사람들도 나를 녹두장군이라고 장난스럽게 불렀다.

이렇게 씩씩했던 나였지만, 집안에서는 한없이 약했다. 남편의 월급은 시어머니와 남편이 관리했고, 나는 월급이 어떻게 쓰이는지도 모르고 살았다. 시부모님은 무척 보수적인 편인 데다 시누이도 다섯 명이나 됐다. 

시누이 세 명은 이미 결혼해 분가했지만,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을 자주 드나들었다. 작은집에서 양자로 들어오신 시아버지는 딸만 넷을 연달아 보다가 뒤늦게 남편을 얻으셨다. 그러니 금이야 옥이야 하며 키운 아들과 결혼한 나는 힘들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힘들었던 일도 이제는 추억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때의 마음고생은 말로 다 하기 어렵다.

시집온 지 얼마 안돼 시어머니가 나를 도둑으로 몰아부치는데, 막내 시누이가 찬장에서 돈을 찾아 시어머니에게 내밀어 누명을 벗었던 일, 시아재가 우리 큰 아들 뺨을 거칠게 때렸는데 시댁 식구 누구도 말리거나 이유를 묻지 않았던 일은 가슴에 오랫동안 맺혀 있었다.

막내를 임신했을 때 일이다. 입덧을 하면서 뭔가가 자꾸 먹고 싶어졌다. 그렇지만 시댁이 어려웠던 나는 감히 말도 꺼내지 못하고 꾹꾹 참고만 지내고 있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임신한 넷째 시누이가 두 조카를 데리고 집으로 왔다. 나도 기운이 없어 죽겠는데 시누이와 조카들 몫까지 밥을 하고 수발을 들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시누이가 시어머니께 쑥개떡이 먹고 싶다고 했다. 시어머니께서 쑥을 절구통에 찧어서 쑥개떡을 만들어 시누이에게 먹였다. 나도 그 쑥개떡이 먹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먹고 싶어도 먹고 싶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쑥개떡이 먹고 싶다는 그 말 한마디 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억압을 받으며 살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떡을 훔쳐 먹으려 밤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평소에는 저녁밥만 먹고 나면 잠을 잘 만큼 초저녁잠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그날은 그 떡이 얼마나 먹고 싶었는지 잠이 오질 않았다. 옆에 누운 남편도 깊은 잠에 빠진 것을 확인하고 살금살금 뒷마루로 행했다. 

어둠 속에서 손을 뻗자 손끝에 쑥개떡이 담긴 바구니가 탁 닿았다. 그런데 그 순간 정신이 퍼뜩 들었다. 내가 지금 참지 못하고 떡을 훔쳐 먹어 훗날 내 배 속의 아이가 도둑놈이 되면 그때 가서 내가 얼마나 땅을 치면서 후회를 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혀를 깨물고라도 참아야 한다고 다짐하며 방으로 돌아와 누웠다. 편안한 마음으로 잠을 잘 수 있었다. 

억울한 말을 듣고도 참을 수밖에 없는 힘든 생활을 계속하다 보니 충동적으로 삶의 끈을 놓아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많았다. 그래서 밤중에 집 뒤에 있는 철길에 갔던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래도 그렇게 죽을 운명은 아니었는지 번번히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내가 이런 환경 속에서 지금까지 참고 살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우리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이 다녔던 국민학교 바로 앞에 집이 있어서 학교에서 하는 방송을 집 안에서도 또렷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때는 아이들이 시험을 참 많이 봤는데, 조회때 우리 아이들 이름을 부르며 수상 내용을 불러주는 학교방송 소리가 들려오면 마음 속에 응어리졌던 것들이 봄날에 눈 녹듯이 스르르 녹아버렸다. 

아이들은 공부도 잘했을 뿐만 아니라 말썽도 크게 부리지 않고 착실하게 커 줬다. 그런 아이들 덕분에 나도 힘든 하루하루를 살아낼 수 있었다. 

 

 

 

2015년 추석을 맞아 온 가족이 모여 촬영한 사진.


◆ 17년 만에 시어머니께 한 번 반항

한 번은 시어머니께 대든 적이 있다. 시집와서 17년을 살면서 계속 참고 참다가 더는 참지 못하고 일어난 일이었다. 당시에는 학교 선생님들이 숙직을 했는데 그날은 남편이 숙직을 서는 날이었다. 그리고 둘째 아들의 생일이기도 했다.

아침식사를 얼른 차려놓고 시어머니께 진지 잡수시라고 큰 소리로 말씀드리고 나는 남편이 좋아하는 떡과 반찬을 도시락에 담았다. 집 근처에 사는 학생 편으로 도시락을 들려 보낼 요량이었다.

 

 

 

마흔 살 무렵의 나.


그런데 한참 있다가 밥상 앞에 앉으신 시어머니께서 국이 식었다며 밥상을 방 한쪽으로 밀쳤고, 그 바람에 국그릇이 방바닥에 뒹굴었다. 그러고 나서는 아들 생일이어서 만든 돼지불고기가 담긴 접시를 내게 휙 던졌다. 

돼지불고기의 붉은 양념이 내 옷과 도시락 속의 떡에 묻어 엉망이 됐다. 그 순간 마음을 참지 못하고 떡을 담은 접시를 시어머니 앞에 탁 내리쳤다. "도대체 왜 이러시냐고, 국이 식은 게 정 마음에 안 드시면 다시 데워오라고 하시면 될 일을 이러실 수가 있냐"며 대들었다.

생전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던 내가 대들자 충격을 받으신 시어머니는 그대로 몸져누웠다. 그렇지만 나는 그대로 내버려 뒀다. 점심 때가 되자 식사를 차려 시어머니께 가져다 드렸다. 아무리 상황이 그래도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은 반드시 했다. 

 

 

 

시어머니 생전 모습.


그러나 시어머니께서는 점심을 드시지 않았고, 나는 조금 기다렸다가 상을 치웠다. 그렇게 행동하면서 나는 나대로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남편에게 전하는 시어머니 성격상 남편이 퇴근하면 이 일을 일러바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역시나 퇴근해서 시어머니께 이야기를 들은 남편이 내게 와서 왜 그랬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렇게 되기까지 과정은 생각 안해 보셨소?" 그러자 남편은 아무 말도 없이 돌아갔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남편도 일조했기 때문에 할 말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 아이들 공부 위해 전주로 나와 생활… 주식으로 돈 벌어

다섯 째 오빠 큰 조카는 우리 큰 아들은 1살 차이인데, 같은 해 대학 시험을 보았다. 큰 조카는 서울대 의대에 합격했으나 큰 아들은 낙방했다. 아이를 서울에서 공부시키지 못해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원래 아이들이 국민학교 고학년이 되면 큰 도시에 가서 공부를 시킬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나, 시아재가 빚을 우리가 떠안는 바람에 큰아들은 기회를 놓친 것이다. 오로지 자식들을 보면서 참고 살아왔는데, 이렇게 대학을 떨어지니 타협할 수 없었다.

시어머니와 남편에게 강경하게 아이들을 데리고 전주에 나가 살겠다고 했다. 큰 아들은 서울에 보내 종로학원에 다니게 했다. 작은 아들은 고1이었다. 막내 아들은 국민학교 6학년 때 전주로 전학을 시켰다.

그 무렵 주식이라는 것을 친구에게서 들었다. 포철주, 한전주 등이 상장할 때였다. 신주공모 청약을 하면 돈 벌 수 있다는 생각에 주식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신청했다. 재수가 좋아서 돈을 벌었다. 100만원 가지고 1700만원 정도 벌었다. 전세를 끼고 4천만원 짜리 아파트를 샀다. 지금 우리집의 논과 밭, 부동산은 거의 내가 마련한 것이다.

◆ 언제나 고마운 나의 오빠

시아재의 사업실패로 엄청난 빚을 떠안았다. 남편의 월급과 일년 농사지은 것을 합해봐야 이자 갚기에도 힘들었다. 남편에게만 맡겨두면 빚 갚을 길이 없을 것 같았다. 운영하던 정미소를 팔았지만 빚을 갚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무남독녀였던 우리 어머니가 외할머니 제사를 지내러 서울에 갈 때면 꼭 아버지께서 어머니를 모시고 가셨다. 서울 간 김에 여기저기 구경도 다니신 것 같다. 사진은 1960년 즈음의 서울대학교 같다. 왼쪽부터 둘째 오빠의 큰 아들, 어머니, 큰 오빠의 큰 아들이고 앉아 있는 분이 아버지다.


결국 친정 오빠에게 손을 벌렸다. 오빠는 언제 갚으라는 말도 없이 그냥 돈을 주었다. 오빠는 처자식을 모르는 남자하고 살지말고 다 버리고 자신에게 오라고 했다. 내게 자식을 버리라는 말은 오빠의 실수였다. 나는 "아이들하고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겠다"고 했다. 오빠는 말실수 했다는 것을 알고 그 이후로는 무조건 내 말을 따라주었다.

오빠에게 은혜 갚음을 나름대로 한다고 했지만 턱없이 부족하다. 하지만 오빠는 내게 한번도 생색을 낸 적이 없다. 내가 검은 것을 흰 것이라고 해도 믿어주었다. 오빠에게 정말 고마움을 느낀다.

 

 

 

1979년 즈음, 시어머니를 모시고 시누이들과 남해를 여행했을 때 남해대교를 배경으로 남편과 찍은 사진. 결혼을 결심하게 했던 훤칠한 남편의 키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 일흔 살에 시작한 등산…"월악산을 못 가본 게 아쉬워"

나는 산에 오르는 것을 좋아한다. 시집온 후로 날마다 일하며 고된 시간을 살다가 일흔 살이 되던 해 봄부터 등산을 시작했다. 한참 뒤늦은 나이에 등산을 시작한 것이다. 등산은 산악회 사람들과 함께 다녔다. 근방 5개 면의 농협이 하나로 통합되면서 생긴 주부산악회였다. 우리 마을에서는 나 혼자 그 산악회에 나갔다.

 

 

 

제주도 여행가서 거문오름에 올랐을 때.

등산은 농협직원들이 사전 준비부터 당일 등산까지 같이 다니며 안내해 준다. 사람이 많을 때는 관광버스 다섯 대까지 불러서 갔고, 보통 때는 석 대를 불러서 다녔다. 그러니까 130~140명 정도의 사람들이 항상 함께 등산한 셈이다. 그 많은 사람들을 태운 버스가 주차장에 도착해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기 시작하면 그것 또한 볼만 했다.

등산이 시작되면 나는 무리의 중간을 기준으로 앞쪽에 있는 사람들, 그러니까 2진쯤에 속해서 올라간다. 산을 오르기 시작하면 뒤처지는 법 없이 그대로 정상까지 반드시 올라간다. 늦은 나이에 등산을 시작했지만 산악회에서 1년에 약 스무 번의 산행을 했으니 가볼 만한 산들은 다 가봤다. 다만 월악산에는 가보지 못했다. 비록 험하긴 해도 올라가자고 했으면 충분히 갔을 터인데, 산안회 등산 계획에 월악산은 없었다.

이렇게 좋았던 등산도 내나이 일흔아홉의 봄에 그만 뒀다. 사람들에게는 그냥 건강이 좋지 않아서 그만둔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만둘 때까지만 해도 다른 사람들 못지 않게 산을 잘 탔다. 

그런데 그 무렵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제까지는 다행히 문제 없이 잘 다녔지만, 혹시나 사고가 나거나 다치기라도 하면 ‘아이고! 늙어가지고 그만 다니지, 뭐하러 다니다가 저래’라는 말을 들을까 싶어 스스로 그만 다니기로 결심했다. 한마디로 은퇴한 것이다. 

 

 

 

서른아홉 살에 전북 남원시 주생면에 있는 주생국민학교 운동장에서 자전거를 처음 배웠다. 그 해 운동장 입구에 심어진 팔뚝만한 묘목은 40여 년이 흘러 하늘 높이 솟았다.


◆ 80년 인생 돌아보니 "인생은 산에 오르는 것과 같아"

내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 아이들이 남에게 손 벌리지 않고, 또 부모한테 손 벌리지 않고 저희끼리 앞가림하면서 잘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딱히 자랑할 만한 것도 아닌 소박한 것이지만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나의 자손들이 남을 헐뜯거나 괴롭히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저 자기 일에 충실하고 정직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열심히 노력한 만큼의 대가는 꼭 받으며 내내 몸 건강하길 바란다.

 

 

 

2014년 추석, 집에서 온 가족들을 모아놓고 사진을 찍었다. 75년 전 친정집 마당에서 그러했듯이. 세월은 이렇게 흘러간다.


80년 인생사를 돌아보니 인생은 산에 오르는 것과 같다. 이제 막 산에 오르기 시작할 때는 힘들지만 포기하지 않고 어느 정도 올라가면 한결 수월해지고 주변의 풍경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푸른 하늘과 시원한 그늘, 불어오는 바람이 올라오느라 고생한 나를 격려해준다. 그리고 마침내 오른 정상에서의 성취감은 그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순수한 나의 기쁨이 된다.

그러니 인생을 살면서 어려울 때를 만나면 편안해질 날이 꼭 올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았으면 좋겠다. 어려웠던 만큼 찾아올 행복도 크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그 행복은 오롯이 자신의 몫이 되어 줄 것이다.

< 안준남씨의 연표 >
1939년 전라북도 순창군 동계면 이동리 출생
1947년 동계국민학교 입학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의대생이었던 셋째 오빠 행방불명
1955년 중앙여자중학교 입학
1958년 전주여자상업고등학교 입학
1963년 약혼식 / 아버지 별세 / 결혼
1967년 큰아들 출산
1969년 작은아들 출산
1973년 막내아들 출산
2008~2017년 산악회 활동
2018년 팔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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