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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기억] (2) 90세 김준영씨: 실패로 이어진 삶...

2019-04-29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모여 커다란 역사를 이룹니다. 조선비즈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기억을 기록으로 남기려고 ‘내삶의 기억'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모든 삶은 기록할 가치가 있다’라는 기치아래 우리 부모님, 이웃 사람들의 삶을 기록할 것입니다. 또 특정 사건이나 특정 장소에 대한 여러 사람의 기억도 모아 역사로 남기려고 합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 바랍니다. [편집자] 

 

김준영 옹(翁)의 삶..."나보다 내 아버지 삶을 자손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억울함과 사기로 힘들게 살았던 삶… "신앙으로 가족 모두 함께 해 삶에 만족" 

 

"아버지에 대해 잘 몰랐던 것 같아요. 어른인 아버지만 봐왔는데, 당신도 어린 시절과 청장년을 거쳤다는 걸 새삼 느꼈어요. 특히 당신의 아버지, 할아버지에 대해 더 기록하기를 원했죠. 그래서 더 놀랐습니다."

 

서울 강동구에서 사업을 하는 김희섭(59)씨는 2017년 초 아버지 김준영 옹(翁)의 88번째 생신기념으로 아버지의 삶을 기억의책으로 내면서 이같이 떠올렸다. 2~3년 전 후배의 소개로 자서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게 계기였다.

 

 

 

 

 

 

김준영 옹의 자녀들이 만들어 출간한 아버지 자서전 ‘당신의 뜻대로 살게 하소서' 기억의책 표지사진. /사진=꿈틀제공

 

 

 

하지만 아버지의 자서전을 준비한다는 게 쉽지 않을 거라는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그러던 중 또 한번 다시 놀랐다. 그는 "아버지는 글쓰는 직업을 가진 적이 없었는데도 평소에도 책을 쓰고 싶어했어요. 책을 내기로 하자, 지금은 보기 힘든 하얗고 큰 옛날 달력을 이면지 삼아 빼곡히 기록하기 시작했어요. 오래 전 이름 하나하나 모두 기억했어요"라고 말했다.

 

 

 

 


김준영 옹(翁)의 아버지 김상남의 모습. 평소 외출 시 둥근 신사모를 쓰고 다녔다는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지만 정작 책이 나왔지만, 자식들의 예상과 달리 아버지의 반응은 무덤덤했다. 대놓고 자식들에게는 말하지 못했지만, 뭔가 아쉬워하는 모습이었다. 자식들은 더 많은 내용을 담지 못해서 그런 것 같다며 추측만 했다. 김준영 옹은 자녀와 손자들에게 책을 나눠줄 때 마다 ‘존경하는 내 아버지를 어디에서 뵈올꼬!’라는 아련한 마음을 손글씨로 남겼다.

 

김준영씨는 책머리에 "나의 부족함으로 아버지가 일구신 재산을 지키지 못하였다. 허나 이렇게나마 아버지가 살아오신 행적을 기록으로 남겨 아버지의 아름다운 정신을 자손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주려고 한다"고 했다. 

 

다음은 김준영씨 기억의책 ‘당신의 뜻대로 살게 하소서'의 내용을 요약한 것. 김준영씨의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 한다. 즉 아래 글에서 나는 김준영씨다.

 

◆ 축음기와 라디오 때문에 시끌벅적했던 집

나는 1930년 10월 24일(음력) 전라남도 영암면 역리에서 4남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듬해 개신리 월비마을에 새로 지은 집으로 이사했다. 우리집은 집터가 500평이나 되는 꽤 너른 곳이었고, 여섯 칸짜리 안채와 다섯 칸짜리 사랑채를 돌담이 두르고 있었다. 가족들이 이용하는 목욕탕도 있었는데 깊이 1m, 직경 2m 크기의 놋쇠로 된 탕도 있었다. 이곳에서 내 동생들 중 준형, 월순, 희순, 강수가 태어났다. 나중에 이사가 6.25전쟁을 맞은 집에서 다른 여동생 명순과 혜순이 태어났다.

 

어린 시절 풍요롭게 살았는데, 다 부모님 덕분이었다. 아버지 김상남은 1904년 영암에서 태어나 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영암군 산림계에서 관리직으로 근무했다. 넉넉했던 어린 시절은 아버지가 산림계의 관리로만 지내지 않고 이런저런 사업을 벌였기 때문이다. 

 

소나무 뿌리를 이용해 기름을 짜는 송근유 공장, ‘싱가미싱(1877년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미국 재봉틀 회사 브랜드)’ 대리점, 주류도매점 등을 운영했다. 아버지는 사업적인 재능이 있었던 것 같다.

 

이 뿐만이 아니다. 아버지는 관리라는 지위를 최대한 활용해 사람들이 잘살 수 있는 길을 적극적으로 찾았다. 마을 입구의 길을 넓혀 우마차가 다닐 수 있게 했다. 이 때에는 직접 땅을 기증했다. 마을회관을 지어 야학을 열고 마을 사람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월비저수지, 동막저수지를 막아서 영암 일대를 옥토로 만들고, 소나무 묘목을 키워 산림녹화도 하셨다. 영암 최초로 재봉틀을 보급하고, 봉제학원을 만들어 기술자를 양성하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은 자주 집으로 모여 들었다. 우리나라 최초로 나온 축음기와 라디오를 듣기 위해서였다. 마당에 멍석을 깔아놓고 거기에 앉아서 즐겼다. 그럴 때면 부엌에서는 손님들을 접대하기 위해 준비하느라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어머니는 집에 온 누구에게나 먹을 것을 챙겨줬다. 

 

 

 

 

김준영씨의 어머니 조희례여사의 모습. 향년 46세로 한(恨) 많은 세상을 떠났다.

 

 

◆ 시련의 연속…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결핵에 걸린 형

 

아버지는 싱가미싱 대리점 사업을 큰아버지에게 전적으로 맡겼다. 하지만 큰아버지가 아편 중독으로 세상을 떠나자, 한쪽 다리가 짧아 장애가 있었던 작은아버지가 가게를 맡게 됐다. 작은아버지를 위해 다섯 칸짜리 집도 지어줬다. 얼마 후 관리를 잘 못해 부도를 맞았다. 집과 가게들 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운영하던 송근유 공장과 작은아버지 집까지 경매로 모두 넘어갔다.

 

그 즈음 형(김준두)은 영암군 유도선수 대표로 순천에서 시합을 하다가 부상을 입었다. 설상가상으로 복막염에 걸렸고 이것이 결핵으로 진행됐다. 형은 광주상고를 졸업하고 17살 나이에 영암금융조합의 이사가 되었다. 

 

집안의 장손이었던 형은 가족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으며, 아버지의 자랑이었다. 그랬던 형이 결핵에 걸렸으니 아버지의 상심이 클 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형을 곧장 경남 통영에 있는 결핵요양병원에 입원시켰다. 형은 해방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족 곁을 영원히 떠났다. 

 

◆ 해방되면서 알게 된 ‘아버지의 비밀’

 

나는 해방의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영암동소학교 고등과 2학년인 16살이 되던 때다. 1945년 8월 15일 오전 10시쯤 학교 확성기를 통해 일본 천황이 항복한다는 내용이 흘러나왔다. 일본인 전용학교인지라 학교 안은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이어 일본인 여교장이 "오늘은 수업을 중단하니 다음 지시가 있을 때까지 각자 집에서 자숙하라"고 했다.

 

학교를 나와 큰길로 내려갔더니, 이 골목 저 골목에서 남녀노소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머리에 수건이나 흰 천을 동여매고는 손에 조그만 태극기를 들고 흔들었다. "대한독립 만세"를 연거푸 외치며 거리를 행진하고 있었다. 

 

언제 저리 많은 태극기를 만들어 놓았을까 싶을 정도로 태극기를 들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어린아이들도 태극기를 흔들었다. 누군가 대한독립 만세를 선창하면 곧이어 군중들이 대한독립 만세를 목청 높여 외쳤다.

 

군중을 인도하면서 대한독립 만세를 선창하는 사람이 누군지 궁금했다. 군중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 보니 놀랍게도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왜 저기에? 이게 어찌 된 일이지?’라며 믿기지가 않았다. 만세 행렬은 거리 곳곳을 누비다가 영암동소학교 운동장으로 모여들었다.

 

교단에 올라선 누군가가 위원장이라는 사람을 소개했다. 언젠가 우리 집에 왔다가 다급하게 부엌방에 숨었던 사람이었다. 게다가 여러 위원들을 소개하는데 아버지가 영암군 농민회 부위원장이라고 했다. 

 

충격적이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아버지가 영암에서 독립운동을 한 김준연, 조극환, 조사현 등과 자주 접촉하면서 이들을 후원했다. 아버지에 대한 자랑스러움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1948년 무렵 찍은 가족사진. 뒷쪽 삼각형 모양으로 오려 붙인 사진이 결핵을 앓았던 김준영씨의 형 김준두다.

 

 

◆ 기독교와의 만남, 한국전쟁과 아버지의 실종

 

나는 1946년 광주 승일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승일중학교는 미션스쿨이라 자연스럽게 기독교와 친해졌다. 나는 기도할 때면 마음이 편해졌다. 결핵을 앓던 형이 이 시기에 죽었다. 아버지는 형이 죽고 난 후 나를 영암으로 내려오게해 영암중학교에 입학시켰다. 

 

1947년 내 아버지는 친지의 권유로 영암면 농회장으로 취임했다. 어느날 밤 괴한 7~8명이 집에 쳐들어왔고, "탕!"하는 총소리와 함께 괴한들은 "시대가 바뀌었으니 아버지보고 내일이라도 자수하라고 전해"라며 대문을 열고 나갔다. 

 

식구들이 넋을 잃고 서 있는데 평상 밑에서 후다닥 사람이 튀어나와서 어둠 속으로 달려나갔다.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며칠 후 영암경찰서에 자신 출두하고, 보도연맹(좌익운동을 하다 전향한 사람들로 조직된 반공단체)에 가입하고 나서야 풀려났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의 고등학교로 진학하려고 했으니 아버지는 나를 영암군청 학무과에 취직시켰다. 1년 뒤에는 영암면사무소 재무계 서기가 됐다. 아버지는 1948년 낭산 김준연의 국회의원 선거운동을 도왔다. 하지만 보도연맹에 가입하고 풀려난 아버지를 사람들이 변절자라며 밤중에 수시로 쳐들어왔다. 가축이나 식량, 생활필수품 등을 약탈해 갔다.

 

이런 어지러운 시국이 계속되더니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7월 28일 이른 아침 면사무소에서 직원들과 밤을 새우다가 인민군이 읍내에 들어오는 것을 봤다. 아버지와 함께 서둘러 서남리의 집으로 달려갔다. 아버지는 급히 천황사로 피신하고, 남은 가족들은 마루 밑 지하실과 집 뒤 대나무밭에 파놓은 방공호에 들어가 몸을 숨겼다.

 

며칠 뒤 큰집 누님 아들이 와서는 아버지가 내무서(북한군 치하의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다고 했다. 진정서를 제출하면 아버지를 구명할 수 있다고 해서 마을 사람들에게 도장을 받았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거절하지 않고 도장을 찍어줬다. 아버지는 끌려간 지 10여 일 만에 풀려났다. 내무서에서 풀려난 아버지는 인민군 치하에서 서남리 인민위원회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태가 점점 심상치 않게 변해가자, 아버지는 결국 9월 중순 보따리 하나만 들고 천황사로 피신했다. 훗날 천황사 스님으로부터 아버지가 강진 무위사로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때 아버지의 나이 46세였다. 그렇게 아버지는 실종됐다. 

 

 

 

 

김준영씨의 영암중학교 시절 모습.

 

 

◆ 인민군 치하에서도 고통, 국방군 치하에서도 감옥

 

나는 당시 민청(북한 인민위원회 산하 청년 조직)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인민군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공석이 된 서남리 민청위원장으로 뽑히게 되자, 면 민청위원장은 민청원들을 소집해 "반동분자의 자식을 뽑았다"면서 노발대발했다. 9월 20일 내무서원들에게 끌려갔다.

 

내무서에 갇힌 지 12일째 되던 날, 내게 처음으로 주먹밥과 무김치 한 개를 줬다. 목청이 찢어질 듯이 아프고 입이 벌어지지 않아 먹지 못했다. 그러고나서 모두 감방 밖으로 나오게 해서는 줄을 세우고 새끼줄로 묶기 시작했다. 복도 양편에는 남녀 청년들이 적기가를 부르면서 발로 걷어차며 희롱했다. 

 

거기서 놀랍게도 아는 사람을 만났다. 소학교 선배였다. 그 선배는 소학교에 다닐 때 일장기를 불태워서 일본 경찰들에게 끌려갔던 일로 영암에서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호남 6개 군의 총사령관이 돼 있었다. 얼떨결에 "형님"하고 불렀다. 그러자 "나가서 너희 아버지를 찾아와"라고 하더니 풀어줬다.

 

집에 돌아오니 인근에 사는 친척들과 마을 사람들이 와서는 위로해 줬다. 얼마 후 좀 전까지 갇혀 있던 영암경찰서에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집이 높은 지대여서 읍내가 환하게 내려다 보였다. 인민군들이 퇴각하면서 불을 지른 것이었다. 운 좋게 살아 돌아온 것을 알게 됐다. 

 

1950년 10월 5일 마침내 후퇴했던 경찰부대가 영암으로 입성했다. 영암읍 청년들을 모아서 대한청년단을 조직했는데, 나는 서남리단 훈련부장 겸 감찰부장으로 임명됐다. 그러나 여전히 밤에는 빨갱이 세상이고, 낮에는 경찰 세상이었다.

 

10월 15일 어머니의 말씀대로 목포로 피신하려고 배를 기다리는 데, 경찰관 몇 사람이 "김상남 아들이 누구냐"라며 소리쳤다. 늘 몸에 태극기를 지니고 다녔는데 놀랍게도 내 몸을 뒤지더니 "이 빨갱이 새끼 몸에서 이런 것이 나왔다"면서 인공기를 흔들었다. 마침 토벌작전을 끝내고 돌아오던 김준병 토벌대장이 이 상황을 보고 구해줬다. 김준병은 아버지가 선거운동을 도와줬던 낭산 김준연의 동생이었다. 

 

◆ 지옥과도 같은 시간들…"전기고문도 당해"

 

결국 11월 어느 날 경찰서에 잡혀갔다. 아버지가 인민위원회에서 활동한 것을 캐물었다. 민청 일을 한 것도 문제가 됐다. 부정할 때마다 전기고문을 당했다. 

 

영암경찰서에서 한 달 보름 정도 지나서 목포형무소로 이송한다고 했다. 경찰서 밖으로 나오니 건너편에 철망을 쳐놓고 사람들을 가둬놓은 게 보였다. 가족들이었다. 어머니가 손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눈두덩이가 뜨거워졌다.

 

함께 이송된 사람은 모두 다섯 명이었다. 형무소에 도착하자마자 몽둥이 세례와 더러운 감방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20년형을 선고 받았다. 나중에는 5년형으로 최종 확정됐다. 그러다 형무소에 갇힌 지 11개월만에 특별사면으로 출소했다. 이때가 1951년말, 전쟁 중이던 시기였다.

 

고향에 돌아왔으나 예정 직장인 영암면 사무소에서는 거절 당했다. 그래서 농사를 지었다. 그러던 중 1952년 8월 군대(국방군) 징집영장을 받았다. 훈련소를 마치고 강원도 금화지구 최전방에 배치되었다.

 

군 생활 중에 둘째 누이 희순의 사망소식을 들었다. 희순은 당시 14살이었다. 열두살 때부터 길거리에서 장사를 했는데, 폐결핵에 걸려 이른 나이에 사망했다. 나 또한 군에서 폐결핵에 걸려 의병제대했다. 그때가 1955년 1월이었다.

 

 

 

 


1956년 1월 8일 김준영 옹과 아내 김복자의 결혼식 모습.

 

 

◆ 아버지 초혼장… 어머니의 죽음… 아내 김복자와 결혼

 

제대 후 집에 와 아버지 소식을 백방으로 알아보았다. 그러나 인민군에 의해 죽었다는 소문만 있었다. 결국 아버지 시신 없이 초혼장(招魂葬)으로 장사지냈다. 아버지를 국가유공자로 만들어 준다는데 속아 당시 5만원이라는 엄청난 거금을 사기당했다. 나중에 보니 아버지는 빨갱이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는 후에 큰누이 월순이의 조카사위인 도의원을 통해 바로 잡았다. 

 

집에 돌아오자 어머니는 내 결혼을 서둘렀다. 아버지 생전에 서로 사돈을 하자고 언약했던 김창주씨 따님과의 혼사를 적극적으로 밀어부치셨다. 몰락한 집안을 재건하는 것이 급하다며 거절했지만, 어머니가 간절히 권유해 처녀 집에 선보러 갔다. 

 

열린 문 사이로 색시될 사람의 얼굴을 얼핏 보았는데, 마음에 안들었다.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와 친척들에게 혼인하지 않겠다고 했다. 단식투쟁을 벌였으나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에 결혼하기로 결심했다.

 

어머니는 결혼식을 며칠 앞두고 어머니가 뇌일혈로 쓰러지셨다. 어머니는 그렇게 한많은 세월을 뒤로하고 향년 46세로 세상을 떠나셨다. 그게 1955년 12월23일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1956년 1월 8일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을 마치고 친구들과 술을 마신 후 늦게 들어간 신혼방에서 색시를 보았는데, 너무 예뻤다. 내가 선보기 위해 왔다가 얼핏 본 아내의 모습이 아니었다. 내가 잘못 본 것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깨가 쏟아지는 날을 보냈다.

 

그러나 내가 아내에게 잘해 줄수록 동생들은 새색시를 형과 오빠를 빼앗아간 적(敵)으로 대했다. 동생들을 위로하고 달래도 소용이 없었다. 낮밤을 가리지 않고 수시로 이 난리가 벌어지곤 했다.

 

아내와 동생들과의 관계는 좋아지지 않았다. 나중에는 큰 누이 월순이가 광주 친척집에서 간호대학에 다니며 동생들을 데리고 가서 학교를 보내고 취직을 시켰다. 내가 뒷바라지 못하는 것을 큰 누이 월순이 해주어 지금도 고마운 마음을 가진다.

 

 

 

 

 1976년 촬영한 가족사진.

 

 

◆ 연이은 사업 실패와 사기…마지막 삶의 터전은 청주

 

결혼한 지 얼마되지 않아 면의원으로 출마했다가 낙선하고는 농사일에 몰두했다. 어느 겨울날 주변 마을 청년들이 찾아와 겨울 한철 술을 팔자고 제안했다. 기왕에 장사를 하려면 술파는 여자를 데려와야 한다는 말에 혹해서 여자 둘을 데려왔다. 그랬더니 이내 술집이 아니라 도박장이 돼버렸다. 이를 아주 나쁘게 여겼던 마을 사람들에게 아내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한때 실수로 신뢰를 잃고 고향을 떠나게 됐다.

 

1961년 4월쯤 목포로 이사했다. 처형의 소개로 3년 가까이 삼학택시에서 사무원, 지배인 등으로 일했지만 사정이 있어 그만뒀다. 막상 회사를 그만두고 나니 살길이 막막해 붕어빵 장사를 했다. 리어카로 채소장사를 하는 젊은이를 만난 후, 이내 붕어빵 장사를 그만두고 채소장사를 하게 됐다. 

 

이후 예전부터 알고 있던 영암교회 목사님 소개로 목표 양동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양동교회 다니던 중 목사님 아들이 나를 속여 젖이 잘 안나오는 염소 세마리를 사게 되는 일이 있었다. 오히려 아들을 두둔하는 목사님을 보며 교회와 멀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폐결핵이 재발했다. 이 후 아내가 화장품 배달 등으로 고생하며 근근히 살아갔다. 

 

하지만 염소 젖 배달사업을 꾸준히 하니 손님이 늘었다. 덕분에 집도 하나 지었다. 월순과 매제가 내가 일하는 것을 보고 희망이 보였던지 내게 150만원을 빌려주었다. 사실 내가 염소를 살 때 아버지가 일구신 고향 땅 일부를 팔고, 높은 이자를 주는 돈을 빌려서 마련한 것이었다. 그런데 욕심이 화를 불렀다.

 

염소젖을 배달하는 과정에 알게된 사람을 통해 군산의 사료공장을 매수하는 과정에서 사기를 당했다. 사료공장 때문에 가족과 함께 군산으로 이사까지 했지만 모든 것을 잃고 다시 광주로 갔다. 그때가 1973년이었다.

 

월순의 남편인 매제는 광주에서 외과의원을 개업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월순이는 내가 150만원도 못 갚고 구걸하러 온 줄 알고 만나려고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매제가 함께 일을 하자고 하고, 월순이 시댁 식구들한테 구박을 받고 있었는데, 병원에서 일하면 월순이의 방패막 노릇도 해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매제의 병원에서 일하게 되었다. 

 

월순이 방 한칸 얻어주었다. 그런데 아내는 월순에게 구박받는다 생각했다. 그래서 처제에게 부탁해 처제 집에 방한칸 얻어 이사했는데, 처남이 불편하게 생각해 다시 나오게 되었다. 이때도 월순이 다시 방을 얻어 주었다.

 

이 무렵 영암에서 선산을 관리하던 사람의 부인이 찾아왔다. 정부가 농지정리를 하는데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일군 논밭과 산이었지만, 돈이 없어 해결도 못하고 결국 아버지의 전재산을 잃었다.

 

매제 병원에서 몇 년 동안 일을 엑스레이 기사로 열심히 일했다. 그러다 매제가 너무 힘들다며 병원을 아는 사람에게 맡기고 미국으로 떠났다. 병원이름도 복음외과로 바꾸었다. 나는 새로 병원을 맡은 원장이 엑스레이 일을 넘기라고 하여 넘기고 우연히 건축일을 하게 되었다. 그 때가 1982년 경이다. 

 

복음외과에서 일할 때 5.18 광주의 비극을 눈으로 목격했다. 당시 우리집 2층에 살던 장흥총각은 집에서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1982년, 아내는 딸 선화의 권유로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나는 어느날 아내 따라 기도원에 갔다가 다시 믿음을 굳건히 가질 수 있었다. 돌이켜 보면 나의 신앙생활을 지켜준 이는 아내였던 것이다.

 

마침 그 때 셋째 여동생 명순의 남편인 유영일 목사가 광주 북동 북문교회에 부임했다. 그래서 교회에 다시 나가게 되었다. 유목사는 나중에 영락교회를 인수하였는데, 우리 부부도 교회를 옮겨 새벽기도까지 열심히 다니게 되었다. 하지만 나중에 유목사하고는 몇 가지 일을 겪으며 결국 다시 안보는 관계가 되었다.

 

이후 나는 신앙생활을 벧엘교회에서 열심히 했다. 그러나 교회 일에서 반대를 많이 해서 그런지 장로가 되지는 못했다. 나중에 동생 김강수 목사가 나를 추천해 벧엘교회를 떠나 광주 주은혜교회에서 장로로 임직식을 올렸다.

 

벧엘교회 다닐 때 목사님 소개로 만난 집사님과 젖갈 사업을 했다. 나는 돈을 대고 집사님은 사업을 운영하는 동업이었다. 그런데 동업자는 나 몰래 빚을 많이 냈다. 결국 매제의 집을 팔게 되었고, 나도 집을 팔고 빚을 갚고 남은 돈으로 광주 진월동에 작은 아파트 하나와 10평짜리 가게 하나를 샀다. 또다시 재산을 잃은 것이다. 그게 1988년이다.

 

광주 가게에서 뭘할까 하다 결국 문구점을 하게 되었다. 문구점 일은 장사가 잘 되지는 않았고 그저 소일거리 정도였다. 그때도 나는 계속 매제 배두현의 재산관리를 하고 있었다. 교회에서나 동네에서나 그저 어른으로서 대접받고 살았으나, 나는 힘 닿는데까지 봉사하면서 살고 싶었다.

 

2001년 12월 4일 71세 나이에 청주에 있는 딸 선화네 집으로 이사했다. 사위의 목회일도 돕고 손주들도 돌볼 수 있기 때문이다. 광주로 떠나기 전에 매제 배두현의 재산관리를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 

 

그 과정에 미국에 있던 매제와 월순이 한국에 들어와 평생 빚으로 남아 있던 150만원을 갚았으나, 월순은 그냥 되돌려 주었다. 또 문구점을 하던 중 보증을 잘못 서 생긴 빚도 청산했다. 모든 빚을 청산하고 청주로 이사한 것이다. 청주 감골에 들어와 이어진 지금까지의 삶은 하느님이 주신 은혜로 이루어진 삶이라 할 수 있다.

 

 

  

 

충북우체국 부부 홍보모델을 했을 때 찍은 사진. /사진=김희섭

 

 

아내 이야기는 따로 말하고 싶다. 아내 김복자는 전남 영암 회문리가 고향이다. 1남 5녀 중 셋째요, 딸로는 언니 김마리에 이어 둘째다. 장인은 일본에 가서 운수회사에서 일했다. 해방 후 돌아와 전남 귀속재산 관리소장으로 일했다. 오빠는 6.25 전쟁 때 인민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아내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당당하게 짐을 감당했다. 아내는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복이다.

 

아이들이 내 모습에서 닮기를 바라는 점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내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은 닮았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절대 하대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늘 어머니에게 존댓말을 썼다. 남존여비 사상이 강할 때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았다. 또 아버지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재산을 일구셨다. 부모형제를 대하는 데에도 지극정성이었다.

 

나는 아이들이 나의 잘못을 보고 절대 아는 사람과 금전거래를 하지 않기를 바란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아버지 재산을 지키지 못한 것이 가장 큰 회환으로 남는다. 하지만 우리 가족 모두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살 수 있다는 것은 큰 은혜로 생각한다.

 

김준영 옹은 현재 위암 투병 중이다. 하지만 수술을 받지 않은 채 청주에서 건강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건강보다는 오히려 아버지의 재산을 지키지 못한 회한을 더 가슴에 품고 있다. 둘째 아들 김희섭씨는 "저희 4남1녀의 아버지이기 이전에 당신의 동생들을 돌봐야했던 아버지는 참 많이 힘드셨겠다는 생각이 든다"면서 "아버지 삶의 기록을 통해 지난 한(恨)과 마음의 상처를 조금이나마 위안받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 김준영 옹(翁) 연표 >

1904년 부친 김상남 출생

1909년 모친 조희례 출생

1926년 부모님 결혼

1930년 전라남도 영암면 역리 출생

1948년 영암중학교 졸업

1951년 한국전쟁 당시 부친 행방불명

1956년 아내 김복자와 결혼

1960년대 초 목포로 이주 / 삼학택시 근무

1970년대 초 광주로 이주 / 병원 근무

2001년 청주로 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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